2009-04-14 발의 · 이해봉 의원 외 122인 ·
제안이유
2·28 대구민주화학생의거는 과거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주적 저항운동으로 3·15마산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건국 이후 자발적 민주화운동의 효시임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은 3·15 마산의거와 4·19혁명만을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하고 있음. 당시 자유당 정부는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했고 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맞아 부패·불의로 민심이 이반했음을 알고도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할 것을 기도했음.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張勉)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음. 일요일인 그날 자유당 정부는 고교생인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하여 대구 시내 전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하기에 이르렀음.
어린 학생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시키려 했던 것으로 학교에 따라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했고, 단체 영화 관람이나 토끼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음. 그러나 학교에 모인 8개 고교 1·2학년 학생 2,300여명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으며 이 과정에서 숱한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음. 이에 본격적인 언론보도로 전국적인 학생시위로 확산된 것임. 당시 야당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고 어른들도 말 못했던 공포 분위기를 어린 학생들이 처음으로 흔들어 놓은 것임. 학생들도 아버지와 형님들의 말 못하는 사정을 알았던 만큼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당 정권에 육탄으로 항거했던 것으로 건국 이후 관제 데모만 보아왔고 관제 데모에만 동원되어 왔던 학생들이 처음으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의사표시를 한 것이며 대구 시민들도 도피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았음.
2·28 대구민주화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를 이어온 자랑스러운 학생민주의거로 민권에 의한 민주 성취를 이룩한 4.19의거가 대구의 어린 고등학생들이 지핀 위대하고 기적 같은 불씨에 의해 발화되었다는 사실은 청사에 길이 간직돼야 하고 그 정신은 길이 보존돼야 할 것임.
1962년 2·28 학생의거 기념탑이 대구시의 지원으로 건립되어 매년 기념사업회와 대구시가 공동으로 행사를 하고 있으며 2000년에는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 일환으로 303억 7,000만원(국비 118억 5000만원, 시비 185억 2000만원)을 지원받아 14,329㎡(4,342평)의 부지 위에 2·28 기념 중앙공원을 조성하였음.
이에 2·28 대구민주화학생의거를 현행법의 민주화운동으로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과거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서의 2·28 대구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것임.
주요내용
2·28 대구민주화운동을 현행법의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킴(안 제2조).
아직 본회의 표결 전입니다
표결이 이뤄지면 의원별 기록이 표시됩니다.
공포일 2010-02-04 · 공포번호 10007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